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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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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기도
daekim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5-8)

 

 기도는 믿는 자의 생명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믿는 자의 영적인 호흡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도 기도를 삶의 최우선 순위로 여겼다. 그들은 “기도는 어떤 선행보다 위대하다.”고 믿었으며, “기도하는 집의 벽은 강철보다 강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열심히 또 지속적으로 기도했다. 예수님도 그들의 기도에 대한 열정이 크고 뜨거운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알고 계셨던 또 하나의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기도나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고, 그네들이 얼마나 기도를 사랑하며 열심히 기도 하는 가를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구제가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네의 의롭고 경건함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로서 축복의 통로이며 영혼을 살찌게 하는 기도까지 그들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하신 것은 그와 같은 위선적인 기도를 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단 6:10) 하루에 세 번씩 아침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에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소리”(고전 13:1)와 같은 것이었다. 기도 속에 마땅히 들어 있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찬양은 없고, 듣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미사여구들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감도는 성전이나 회당에서 기도드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시간에 맞추어 성전에 들어가 기도한 사실이 (행 13:1)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성전이나 회당에 얽매인 분이 아니시다. 다시 말하면 특정 장소에서 드리는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경건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우리의 영혼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다.


 기도는 어디서나 할 수 있기에 거리에서 해서는 안 될 까닭이 없다. 서서 하는 기도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정해진 기도의 자세는 없으니까 말이다. 성경의 기록엔 엎드려서 한 기도도 있고(민 16:22; 수 5:14; 단 8:17; 마 26:39), 무릎 꿇고 한 기도도 있으며(대하 6;13; 단 6:10; 눅 22:41; 행 7:16), 앉거나 서서 한 기도도 있다는 사실이(삼하 7:18; 삼상 1:8; 막 11:25) 이를 확인시켜 준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거리에 서서”하는 기도를 금하신 것은 “장소는 거리로, 자세는 서서” 하는 것으로 택한 그들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금하신 것은 “위선적인 기도”였던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보다는 맡은 직분 때문에 혹은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주일마다 교회를 찾는 성도들이 적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럴듯한 어휘와 표현들을 총망라한 기도문을 단상에서 읽는 제직들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다. 작성한 기도문을 읽는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교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바리새인적인 기도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드리는 것이다. 세상이 안겨주는 갖가지 근심과 고통과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을 향해 맞추고 원하는 바를 간절하게 아뢰면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 어디서 기도하는가를 문제 삼지 않으신다. 얼마나 많은 성경지식을 동원하여 유창한 기도를 하는가도 관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릎 꿇고 간구하는 이의 동기와 마음을 보실 뿐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시 27:28) 


 예수님이 기도하기 적합한 장소라 하신 “골방”은 물건들을 쌓아두는 방으로 금은보화를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골방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 하신 것은 순수한 동기와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화로 갚아 주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진실로 기도의 응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골방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넘치도록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해주시며(롬 5:5, 8:16),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주시는 것이다. 


 흑자는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기도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갈 필요도 없으며, 기도는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런 의문을 품는 이들은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공적인 기도” 아닌 “사적인 기도”에 관해서 임을 기억해야 할 줄 안다.


 바리새인처럼 큰 거리에서 전시적인 기도를 하는 대신 어두운 골방에 들어가 아버지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를 드리라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방인 같이 중언부언하는 장황한 기도도 하지 말라고 일러주신다. “중언부언”은 쓸데없는 말을 반복한다는 뜻이며, 유대인들도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많이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름에 있어서도 “자비로우시며, 전능하시고, 위대하시고,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며” 등 유사한 의미의 형용사들을 16개 까지 사용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같은 의미의 표현들을 나열 하곤 했다. 


 이방인의 경우엔 이보다 더 심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대결할 때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라 외쳐댔던 사실이(왕상 18:6) 이를 말해준다. 


 예수님은 이같이 쓸데없는 말들을 되풀이 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도 같은 말을 반복하며 기도하신 적이 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 세 번을 반복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그것이다.(마 26:36-46) 


 예수님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뢸 때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간구하라고 가르치시기도 했다.(눅 18:1-10) 따라서 예수님은 같은 말을 계속하는 기도 아닌 자신이 유식하고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유사한 의미의 어휘들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입술만의 기도를 금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음은 멀리 있으면서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사 29:13)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슬퍼하신 하나님께서 입술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익숙했던 또 다른 기도는 “긴 기도”였다. 그들은 기도가 길수록 잘 응답된다고 생각했다. 길수록 “잘하고, 은혜롭고, 응답받는 기도”라 믿는 사람들은 오늘 날에도 많기만 하다. 너무나 잘못된 기도에 대한 인식이다.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무엇을 원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시기에 기도가 길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면 기도 자체가 필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칼빈은 “믿는 자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축적된 근심과 걱정과 문제들을 빠짐없이 고하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믿는 자의 기도다.”라 말해 준다. 


 기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고 하신 말씀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승인할 수 있는 것만을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그에게 영광 돌리며 사는데 필요한 것들만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함이라.”(요 14:13)라 하신 까닭이 여기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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