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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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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살인
daekim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내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1-26)

 


 예수님은 그를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지녀야 할 품성과 자질에 관해 들려주셨다.(마 5:3-12) 그들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도 빛과 소금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셨다.(마5:13-16) 그런 후에 율법과 선지자에 관해 말씀하시면서(마 5:17-20) 그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 오신 것을 강조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로 율법과 선지자에 관한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그 까닭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


 예수님의 설교를 음미함에 있어 우리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수께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율법 전문가들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 권위에 놀랐고(막 1:22),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마치셨을 때도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권위에 압도되었다는(마 7:28-29) 사실은 예수님의 권위가 어떠했나를 잘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율법학자의 말도 인용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셨는데도 듣는 이들은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놀라운 그의 권위를 보고 느꼈던 것이다.


 예수님이 권위 있게 들려주신 첫 번째 말씀은 “살인하지 말라.”(출 20:13)는 계명에 관해서였다. 이 계명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창조하신 인간의 생명을 거두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계명이 일체의 살인행위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창 9: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살인자에 대한 처형을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타락한 이방인들을 진멸시킬 것도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주권자에게 악을 제거하고 처벌할 권한까지 주셨다.(롬 13:1) 그러기에 국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우발적으로 범한 살인에 대해서는 가벼운 형벌을 가하며, 정당방위로 인정되는 살해행위에 대해서는 무죄로 처리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특별한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워 자행하는 살인행위를 금한 것이다. 


 유대의 율법 전문가들은 계획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제 6계명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믿었고, 그렇게 가르쳤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예수님은 살인의 정의를 살인행위에만 국한시키지 않으시고 생각과 표현에까지 확대시키신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구를 죽일 생각을 하거나 그런 의도를 말로써 나타내기만 해도 육계를 범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살인에 관한 생각이요 기준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을 심판에 이르게 하는 “생각의 살인” 이라 지적하신 것이 ‘분노“다. 분노처럼 자신과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며 인간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란시키는 것도 드물다. 야고보는 ”인간적인 분노는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이루지 못한다.“(약 1:20)라 했으며, 바울도 ”분노와 노여움을 버리라.“(골 3:8)라 말씀하셨다. 


 1세기 로마의 정치가이며 법률가였던 씨에로는 ”분노한 마음을 지니면 어떤 일도 올바르게 할 수 없다.“말했고, 세네카는 ”분노를 품으면 미친 사람이 된다.“고 했을 정도로 노한 감정은 모두에게 해로운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분노가 다 나쁘고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항상 성스럽고 순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듣기는 속히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란 말씀을 지키기 위해 분한 마음을 억제하며, 예수님과 같은 의로운 분노만을 발하려 노력하는 이들도 있다. 마틴 루터도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며, 죄악을 증오하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는 ‘사랑의 분노”라 말했다. 


 예수님이 살인과 동급으로 여기신 마음의 살인인 “분노”는 불의한 분노, 오만과 악의와 복수를 원하는 마음에 찾아드는 분노를 의미하며, 이 같은 분노를 마음에 품으면 살인을 금한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세상의 기준은 드러나는 행위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거나 처벌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을 계획하며 목표로 삼는가에 따라 인간을 판단하며 심판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에는 절대로 오류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시며(시 94:11, 139:23), 그것이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하시기 때문이다.(히 4:12) 


 인간의 마음속에선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악을 도모하려는 욕망, 그리고 금지된 것을 하고 싶은 욕구와 그것을 억제하려는 자제력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인생을 사는 동안 그릇된 욕망과 이성의 갈등은 계속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피할 수 없는 갈등에서 많은 경우 이성이 열세에 몰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도다.”(롬 7:19)라 고백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며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조차 “선과 악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면 아무도 예수께서 설정하신 기준을 만족시키며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될 수 없을 것이라 한탄할 필요는 없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바울은 결국 악을 디디고 일어나 승리한 까닭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는 바울의 증언으로부터 우리도 생각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기준에 맞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드리고, 그로 하여금 우리를 주관하시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의 생각을 행위와 동일시 하실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생각의 표현까지도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형제에게 화를 내며 “라가”라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라가”는 지적으로 수준미달임을 직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으로 것으로 “돌대가리”에 해당하는 용어다. “미련한 놈”은 글자 그대로 지능계수가 낮은 이를 가르치는 말이기에 상대에게 “라가”라 하거나 “미련한 자”라 하면 그를 모독하며 경멸함을 의미한다.


 분노한 마음과 모욕적인 언사가 살인행위로 이어지지 않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노하여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없이 사용하면 제 6계명의 위반이라 가르치신 까닭은 그런 마음과 언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살인이라는 행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다.”(요일 3:15)란 말씀이 이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 

 

 곰곰이 그리고 정직하게 생각해 보면 매사에 우리를 대적하며 우리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 때문에 분노가 솟구치며, 그를 마음껏 욕하고 싶을 뿐 아니라 “저 사람 죽었으면 좋겠다.”란 생각까지 들 때가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상대에 대한 적개심”은 그에 대한 “살인”으로 연결되며, 행위만이 처벌대상이 되는 세상 법에는 저촉되지 않지만 계명위반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살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이 “예물을 제단에 들이려다가 형제에게 잘못한 일이 생각나면 즉시 그에게 가서 화해한 후에 예물을 드리며”,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법정으로 갈 때 재판까지 가지 말고 타협하라.”는 말씀을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을 지닌 채 예배드리는 것은 살인을 저지르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과 같기에 그것은 “진정과 신령”의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못할 일을 해서 고소를 당했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올바르고 현명한 처사지 당당하게 범법행위를 부인하여 재판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아 철창신세를 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이다.


 살인은 참으로 중대한 범죄다. 타인을 향한 분노와 상대를 경멸하고 모독하려는 마음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는 살인에 버금가는 죄악이다. 이런 무서운 죄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그리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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