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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0주년 안보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4)
chonhs

 

(지난 호에 이어)
그 동안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본 1885년대의 조선, 민초의 삶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국내외 학자의 관찰도 참조했다. 이쯤이면, 이 연재의 본뜻을 밝힐 때가 된듯하다.


여러 석학의 조선, 그리고 타국의 성공, 실패담을 다시 살펴보며, 이로부터 우리는 "조선은 왜 실패했나"의 가설을 도출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실패했구나" 하는 이해를 지금부터 10여 회에 걸쳐 쓸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 대한민국은?"이 핵심이다.


즉, 과거의 성찰로부터 가설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 가설을 다른 사례로 입증하면, 가설은 곧 이론이 된다. 그 이론으로 "지금"을 보고, 더하여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본 연재의 제목은 "조선은 왜 실패하였나"에서 "지금 대한민국은 잘하고 있는가"가 될 터이다.


베니스의 흥망


이탈리아의 동쪽, 아드리아해의 북단에 있는 수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도시, 베니스는 중세기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에 속했다. 베니스는 810년 독립했는데, 당시 로마제국 몰락 후 유럽경제가 회복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무역이 확대되어, 이 기회를 십분 활용, 부유해질 수 있었다.


경제가 확장되면서 인구도, 1050년 4만5천 면에서 1200년에는 50% 증가했고 1330년에 다시 50% 증가해 11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규모는 파리와 견줄만했고, 런던에 비하면 세배가 되는 크기였다.


베니스가 이런 경제적 성공에 이를 수 있었던 토대는 코멘다(commenda)라는 무역거래를 위한 계약제도였다(합자회사). 이는 두 명의 파트너가 참가하여 한 명은 베니스에 머물러있고, 다른 한 명은 항해를 떠나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자가 자본을 대고, 떠나는 자가 물품을 운반하는 것이다.


돈이 없는 젊은이라면 물건을 싣고 항해를 함으로서 무역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또, 돈을 벌면 당연히 신분상승도 됐다. 머물러 있는 자가 100% 돈을 대면, 이윤의 75%를 챙겼다. 반면 머물러 있는 자가 67% 돈을 대면 50%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젊은 신흥부자 가문이 등장할 여지가 생기고, 이에 따라 정치체제 역시 영향을 받게 되어 한층 개방적으로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베니스의 수장도 베니스를 다스리는 종신적 민회(general assembly)에서 선출했다.


이런 정치, 경제 제도는 서로 상승효과를 내며, 베니스는 무역으로 해상강국의 위세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 일까? 지구는 둥글기 때문일까? 좋았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그간 베니스의 번영을 가져다 주던 제도가 어느 순간 문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베니스는 첫 발을 잘못 디뎠다. (지금 생각하니 창조적 파괴를 했어야 했는데…)


오랜 번영 속에 갈등이 커졌다. 즉, 신흥부자가 계속 생겨나자, 이들이 기존권력에의 도전세력이 됐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평의회(great council)는 신흥세력을 막아 버리고 싶어했고, 그 방법으로 1년 임기의 대평의회 임기를 변경, 집안에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대평의회 의원을 지냈을 경우 그 자손은 자동으로 의원이 되었다(1206년). 다시 1297년에, 지난 4년간 의원이었던 이는 자동으로 다시 의원이 되었다.


이렇게 되니, 의원은 소수 귀족이 독식하는 세습제가 되었다. 신흥 귀족도 가만있지 않았고, 소위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대평의회는 의원정원을 늘려, 반발이 심한 정적을 달랬다. 결국 의원은 450명에서 1500명으로 늘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남은 것은 탄압밖에 없는 듯했다. 새로운 귀족의 탄생을 막기 위해 코멘다 제도를 금지시키고, 무역을 정부가 장악해 국유화하고, 개인무역에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1314년).


이로서, 베니스의 번영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1500년에 이르러 경제는 몰락에 이르렀다. 인구도 줄었다. 오늘날 베니스의 경제라고는 관광업뿐이다. 왜 그랬을까? 정치제도가 길을 잘못 들면 경제 역시 잘못되고, 국가는 실패의 길로 가게 된다.


 이집트의 가난


이집트인의 소득수준은 미국시민의 12%에 불과하고, 기대 수명도 10년은 짧다. 인구 20%가 극심한 빈곤층에 속한다. 사실 북한, 시에라리온, 짐바브웨 등과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카이로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24세의 젊은이는 타흐리드 광장에서 시위를 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우리는 정부의 부정부패와 탄압, 형편없는 교육으로 신음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썩어빠진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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