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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나(15)-고종, 민비 그리고 김옥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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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김옥균, 혁명을 꿈꾸다


임오군란 후, 청은 조선을 속국(식민지)으로 삼으려 하지는 않았다 해도, 왕의 아버지를 납치하는 등 종주권을 강화하고 내정간섭을 더해갔다. 그러나 고종과 민씨 정권은 다른 열강과의 세력균형을 위해 청의 종주권 강화를 감내하고, 친청 수구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우선 청을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대원군과 함께, 주위의 쇄국파가 물러나자 그 빈자리를 민씨 일족이 차지, 조정은 민씨 일색이 되었다.


이들은 당시 민씨 집안에 양자로 들어온 민영익이 중심이 되어 영향력을 키우며 김옥균 등 개화파를 견제하고 있었다. 1883년, 청과 종주국 관계에 있던 월남에 프랑스가 침입하자, 월남을 돕고자 조선에 주둔한 청군이 대부분 철수한다.


김옥균은 정변의 기회기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한다. 때마침(1884), 개화파 인사 홍영식이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후 우편제도를 건의하여 우정국이 창설되고, 그 해 12월 4일 우정국 개국 기념식이 예정되었다.


김옥균은 이때를 거사일로 정하고, 이를 고종에게 알린다. 고종은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치를 경의 지모에 맞기겠다”고 화답한다.


 김옥균은 개화파를 중심으로 100여명을 행동대원으로 동원하고, 고종을 설득해 정변을 승인 받고, 청의 방해는 일이 막는다는 3책을 일본 공사 다케조와 밀약하고, 정변을 추진한다.


 미숙한 정변


당일, 국내외 인사 18명이 참석한 공식 일정이 끝나고, 저녁 축하연이 시작될 때, 각본은 대궐에 불을 지르면 이에 대신들이 대궐로 갈 테고, 이때 매복한 자객이 이들을 죽이기로 하였으나, 예정된 방화가 실패하자 우정국 옆 민가에 불을 질렀다. 이에 놀란 민영익이 무슨 일인가 밖으로 뛰어나갔으나 자객의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돌아오자, 누구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옥균이 고종에 달려가 “청군이 반란을 일으켜 창덕궁으로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어서 피신 하십시오”하고 고종과 민비를 경비가 용이한 경운궁으로 안내했다(납치?). 


 “이제 할 수 없습니다, 일군에 경호를 의뢰하겠습니다” 김옥균은 ‘일본공사래호아’(일본공사는 와서 나를 호위하라)라고 쓴 후, 고종의 서명을 받아 일 공사에게 병력을 요청하고, 우정국으로 돌아가, 대신들에게 “'국왕이 경운궁에 있으며, 모든 신하는 그리로 들라는 어명이 내렸다” 했다. 신하들이 도착하자 숨어있던 자객들이 이들을 살해한다(11명).


다음날 아침(12월 5일) 김옥균은 고종의 재가를 얻어 신내각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 때쯤 민비는 속은 것을 알고, 경기감사 심문택을 시켜 청에 구출을 요청하고,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다.


해질 무렵 청군이 도착, 잠시 교전이 있었으나 타협, 궐 밖은 청군이, 궐 안은 일군이 지키기로 한다.


12월 6일, 고종의 재가를 얻어 혁신강령이 내려지려는 순간, 청군(1500명)이 일군(150명)을 공격하니 “1개 중대면 청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던 일 공사의 장담은 허언이 되고 일은 퇴각한다. 밤 사이 청 장수 원세개는 일 병력 규모를 파악하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 했겠지!


김옥균도 함께 퇴각, 인천을 거쳐 도일하니 이로서 3일 천하는 막을 내렸다. 너무 쉽게 일을 믿은 탓이다. 밀약은 무슨!

 

결론


 무엇보다, 정변 당시 백성의 지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백성의 깊은 유교사상이 근대화에 역행하고 있었다. 백성이 보기에 일은 항시 개혁을 해야 한다고 했고, 김옥균이 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김옥균 일당은 왕권에 도전하는 무뢰한으로 인식됐다.


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사후보복에 적극 나선 것은 군중과 수구파였다. 분노한 군중은 김옥균의 집, 일 공사관을 방화하고 관련자를 색출한다. (이때 죽은 일인 38명).


김옥균의 부, 모, 형제, 부인, 딸이 모두 옥사 혹은 자살한다. 1년 동안 500여명이 연좌제로 잡혀 살해된다. 


 일에 피신한 김옥균은 어려운 망명생활 10년째, 이홍장에게서 “동양의 장례를 논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고, 청으로 향하나 동행한 고종의 밀사 홍종우에게 살해된다.


 1894년 4월27일 김옥균의 유해가 강화도 양화진에 도착한다. 일본 시사신보 기사를 보자. ‘시신은 조각조각 떼어져, 팔도에 보내어 저잣거리에 내다 걸게하고, 목은 양화진 형장에 효수해 놓았다. 이는 민비와 민영익이 10년을 벼르다 벌인 복수극이었으리라’


 ‘대역부도옥균’이라는 걸개와 함께, 양화진에 있던 그의 머리는 그를 따르던 일인이 훔쳐, 도교의 어느 신사에 묻혔다 한다(?)


 자객 홍종우가 오자, 고종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그를 맞이한다. 김옥균의 묘는 충남 아산에 있다.


갑신정변은 여러 시각으로 평할 수 있겠으나, 직접적인 실패 원인은 민비의 청군지원요청을 막지 못한 고종의 유약함이다. 고종이 이것만은 목숨 걸고 막았어야 했다. 거사 5일전에 보고받고, 이에 화답을 했다면 자신도 결심을 했어야 한다. 국운이 이성계에서 시작되고, 고종에서 끝나는 형국이다.


 김옥균도 고종을 진정한 동지로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 왕에 허위 보고하고, 협박하여 정변을 성공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종의 리더십 부재, 백성의 전 근대성, 김옥균의 미숙이라는 3박자가 맞아 떨어져, 조선 최초 개항 후(1873. 강화도 조약) 10년, 조선 근대화의 기회는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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