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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미(Vimy Ridge)전투
chonhs

 

 서론


 19세기 말, 세계는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쟁탈전이 극을 이루고 있었고, 이어 20세기에 들어 그들간에 두 진영으로 나뉘어 정치적, 군사적 연합으로 서로연결, 상호 견제와 힘의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유럽의 여러 나라는 자국 예산의 50% 이상을 군비에 투입,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유독 독일이 신흥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라예보에서 유라시아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비르디난드)를 저격, 발칸에 불을 지피니,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인 독일이 개전, 동맹관계로 연결된 여러나라가 연이어 참전, 세계대전으로 확대된다.(1차 세계대전)


 먼저 독이 중립국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이하 불)를 공격하니 영국이 참전한다. 독은 불원간 러 또한 참전하리라 보고, 군사력 대부분(80%)을 서부전선, 불에 투입, 러가 참전하기 전에 신속히 불점령을 마치고, 대러전을 펼친다는 단기전을 염두에 둔다.


 그러나 독이 벨기에를 넘자 영이 불과 연합해 독의 남진을 막고, 동부전선에서는 러가 생각보다 일찍 개전을 선포하니, 독은 피하기를 원했던 두개의 전선을 동시에 대처해야하는 상황이 됐다.


 상황이 힘들어지자 독은 서부전선에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동부전선에 힘을 집중하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북단, 비미 능선에 요새화 된 전선이 형성됐다.


 불과 영은 이를 회복하려 했으나, 진지가 요새화된 탓에 이를 돌파치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캐나다는 옆 나라 미도 개입을 꺼려하는 전쟁이었으나, 영연방으로서 자동적으로 영군의 일부가 되어 전선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이렇게 캐나다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그리고 캐나다군은 1917년 부활절에 독일 점령지 비미(Vimy Ridge)에서 대승해 실지를 회복한다. 캐나다에 있어서 비미전투는 전승 이상의 국가형성 의미를 갖는다. 비미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는 안내 책에는 "The Birth of a Nation" 이라는 부재가 달려있다.

 

 본론


 당시 캐나다 정규군은 3000명, 각 지역에 산재된 방위군이 6만 명이었다. 영의요청을 받자 각 지역 방위군에서 지원자를 받는다. 대체로(60%) 영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 옛 고향에 간다는 생각에 자원, 주 일회(토요일) 행진연습 수준의 군사훈련을 받았던 이들을 영에 보내 정규훈련을 받게 한다.


 1915(Ypres), 1916(Summy), 두번의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이는 영연방군으로 편입, 영(또는 불) 지휘관 밑에서 전투했기에 눈에 뜨이는 성과도 없었으나 비미전투는 처음으로 캐나다군만으로 4개 사단(3만명)을 구성, 캐나다장군(줄리안 빙)의 지휘를 받기로 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당시 전선의 주 모습은, "돌격"을 외치며 달려오는 적을 참호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가, 기관총을 난사하는 식이었다(진지전).


 방어선 전면에 두껍게 깔아놓은 철조망 탓에 이를 가로질러 돌격하기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독이 이를 해결코자, 참호속의 적을 향한 화염방사기, 가스탄을 개발한다.


 가스탄은 바람이 다행히 적진 쪽으로 불어준다면 매우 효과적이었다. 특히 탄약과 포대를 운반하는 군마는 마스크를 씌울 수도 없어 그대로 피해를 봤다. (Vimy 전투 중 독일 군마 5000 두가 사망, 후퇴시 포대를 후송하지 못했다.)


 영은 철조망을 신속히 절단하기위해 신형 포탄을 개발한다(접촉신관, 106 fuse 탄). 각 참호와 참호를 연결, 전후좌우로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는 진지전이 1차대전의 주 전술이었고, 적의 포화를 피해, 임시대피, 부상자 치료, 탄약 , 식수보관, 지휘 통신소 보호를 위해 지하 땅굴(tunnel)을 팠다.


 때로는 적지 안까지 땅굴을 파고 폭탄을 설치, Vimy 전투시 개전과 동시에 이를 폭파시켰다.(지금도 대부분의 땅굴에는 폭발되지 않은 탄약이 있어 출입금지).


 Vimy는 불 북부의 평야지대에 동서로 뻗은 능선으로(145고지), 이를 점령하면 먼거리까지 적 동향을 관찰할 수 있어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우선 두 번의 전투경험을 살려, 새로운 전술을 개발한다.


 종전에는 점령목표, 전투방법 등 전투계획이 통상 지휘관(소대장)까지만 전파되어, 전투 중 지휘관이 사망하면 문제가 생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km에 이르는 독의 전선을 항공으로 사진촬영, 각 병사에게까지 자기소대가 점령해야할 적진의 상황, 포대 위치 등을 교육하고, 적진 모형을 만들어 수 주간 공격연습을 반복했다(항공사진 4만장을 병사에 배포). 


 또, 영 1개 포병사단의 지원으로 중포, 전술포를 종전보다 3배 배치했다. 공격은 9일 아침 5시30분이었으나 2주전부터 계속 포사격을 가해 이미 독일 포대 대부분이 파괴됐다(80%).


 공격은 영 포병 탄막사격의 탄착점이 매 3분마다 60 미터씩 전진하고(rolling barrage), 그 뒤에 보병이 탄착점의 전진 속도에 맞추어 진격하는 식이었다.


 캐나다 병사는 탄막사격 뒤를 가까이 따라가면 됐고(creeping barrage), 독군은 영 포병의 폭격을 피해, 지하 땅굴에 피신, 지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매몰되는 수가 많았다(2만명 행방불명).


 "Mac Dowell 대위는 피신하는 독 병사를 따라 땅굴로 들어갔다. 이미 전세의 위급함을 알고 있던 독 병사에게 항복을 설득, 장교 2명, 병사 75명을 포로로 잡는다." 대위는 소령으로 현지 승진, 훈장을 받는다(Victoria Cross).


 1917년 독은 이미 전 전선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Vimy 지역의 예비병력(제 8군)은 이미 타 지역으로 이동됐고, 평시 260명 수준의 중대는 150명으로 축소 운용되고, 많은 포 역시 동부전선으로 떠난 상태였다.


 이미 1개월 전 독 사령관(Von Fasbender)은 영불의 군사력 증강을 간파, 공격을 예측하고, 지원을 요청했으나, 독일 참모본부는 이미 지원해줄 병력이 없는. 상태였다. 3일간 전투 후 독은 후퇴한다(8만 사망).

 

 결론


 독립은 했다지만, 아직도 영 식민지 정서 속에 있던 캐나다가 영의 요청에 의해 참가한 전투였으나, 비미 전투는 캐나다군만으로 4개 사단을 구성, 캐나다 지휘관 밑에 이루어낸 승리였기에 군에게 새로운 긍지를 심어 주었다.


 "이제, 우리는 영연방의 일원이 아니라, Canadian" 이라는 일체감을 일깨워 주었다. 당시 보병 대위였고, 전후 신문기자가 된 Gregory Clark는 비미 전투에서 캐나다의 민족의식이 탄생했다고 술회했다.(There were Canadians and I experienced my first sense of Nationhood).


 제국주의 탐욕이 일으킨 1차 세계대전 참여였으나, 캐나다는 전쟁 참여를 통해, 전국에서 모인 병사가 처음으로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나니, 우리는 캐네디언이라는 동족의식, 민족의식이 형성된 것이다. 올해가 비미전투 100주년이다.


 당시 파리 신문은 비미 승리를 캐나다가 준 부활절 선물이라며0 감사했다.("Canada's Easrer Gift for France"). 불은 넓은 Vimy Ridge를 기념공원으로 캐나다에 영구 기증했다. 사령관 빙은 전후 캐나다 총독이 된다. 훌륭한 군인이었다.


 비미에서 산화한 3,598명에 명복을 빌고, 부상자 7,000명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비미가 준 캐나다 민족의식 발흥을 축복한다(오!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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