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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福泉) 칼럼

leehyun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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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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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hyun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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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이/사/용/포…’

 

 이삿짐에 무슨 포를 싣고 다니는가? 별안간 어디에 전쟁이라도? 글 제목이 뚱딴지같이 무슨 포 소리야? 방탄소년단의 열광적 무대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총소리와 어찌 비교를 할까만, 화약이 터지는 것 같은 폭발적인 인기가 가히 지구촌을 환상적인 이변으로 달구고 있잖은가. 


 폭탄 터지는 한맺힌 전쟁의 참상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옛 세월이라서, 불안과 공포 속에 가슴조리던 그때 그시절, 끔찍이도 절박하고 험했던 세상을 증거하는 우리 세대들 어찌 잊으리. 그 포성들을 “이해하니까, 사랑이 움터, 용서하게 되니까, 포용할 수 있다”는 순우리말 사자성어라고 독자들의 공감대를 자극하고 싶어 억지로 지어낸 글자다.


 글뜻이야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가슴을 활짝 열지 않는 한 실행할 수 없는 말임에 틀림없겠다. 어렵고 까다로운 세상만사에, 먹고 마시는 것처럼 빼놓을 수 없는 매우 귀한 성경의 핵이며 불전의 자비와 영적인 비타민이기도 하다.


다스리고 추스르며 고운 맘씨로 백번씩 양보해야 빚어내는 혼의 찬가 중에 불멸의 명곡이랄까?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사용포’의 고운 성품으로 갖추어져 있다면 만사가 행복과 평안일 터이다.


 땀흘려 노동으로 얻을 수도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악을 써서라도 달성 하겠지만 얄궂은 행동거지나 번민의 골짜기를 헤매며 살아갈 때, 스스로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한 이룰 수 없는 특수한 인성의 생태다. 


어느 누가 감히 쉽고도 어려운 ‘이사용포’에 자신할 자 있으랴. 성직자들, 교직자들, 자칭 인격의 첨병이라 할지라도 떳떳하게 이 낱말에 스스로 자만으로 자유스러울 자 아무도 없다. 성직자들이 이 말을 유도하지 않고선 강론도 설교도 성립될 수 없다. 설교와 강론의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인 것이다.


 필자가 참석했던 주일예배에 설교 목사님의 용서하라는 말씀 속에 바로 이, 이사용포의 단어가 삼십 번 이상씩 동원되었던 기억이 난다. 아니 이 순간도 주장하며 설교를 담당해야 했기에 어느 누가 뒤질세라, 아무나 다 말만으로야 마음대로 털어낼 수 있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순수한 우리말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네 글귀의 의미야 얼마나 쉬운가. 드러내기야 식은죽 먹기로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한 말이다. 그런데 실행하고 보여주기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에 글 속에 불가항력적 고충을 털어내련다.


그 좋은 이웃들도 좋은 친구였기에 서로 반목하는 일이 행여 언제 있으리요. 부담없이 자유하며 덤덤하게 살다가도, 삐그덕거린 한순간의 상상할 수 없는 불화가 틈새를 파고드는 세상살이다.


깨알 같은 하찮은 인간사 툴툴대며 남이 돼버린 일들, 우리 곁에서 날마다 겪고 살아간다. 철천지원수가 따로 없지 않는가. 수십 년을 함께 사는 부모형제, 일가친척들, 오순도순 살아도 짧은 인생인 걸 별일도 아닌 사소한 삶의 한마디에 뒤틀려 담을 쌓고 살아가는 주위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인 그 자리에 눈물과 설움들, 우리민족만이 터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견뎌내야 하는 역사의 상처가 아니던가. 인륜이 끊긴 그 사연들이 누구 탓인가? 대국들의 정치싸움에 말려들어 핏줄이 끊겨 살아야 하는 변란을 우리는 겪어야 했다.


그렇게 흩어진 인연들과 다시 만남들 얼마나 한이 맺히고 서럽던가. 언제 또 만날 거냐고 피눈물을 쏟아내며 다시 헤어짐의 통곡들을, 민족의 그 한 많은 역사를 과연 언제 끝장을 볼 것인가. 


그런 일을 바로 발 밑에서 겪고 보면서도, 함께 하는 부모형제들인 우리들 주변엔 갈라서지 못해 서로를 질시하고 응얼거리며 온갖 심통을 부리며 살아야 되느냐 말이다. 


잘 살아 보자고 구슬려 얼리고 달래고 두 손 싹싹 비벼도 보지만, 웬걸 몇날 지나면 또다시 개미 쳇바퀴 돌듯 반복의 삶이다. 투덜대며 눈길로 쥐어박고 악을 쓰고 입에 거품까지 마치 칼끝이라도 번득거려야 해결점을 도출할 수 있을까 으르렁거린다. 일가친척, 부모형제들과 오순도순 정답게 사이 좋은 가정들이 어찌 없을까만, 부자연스런 삶의 모습들에 얽힌 부모형제들과 이웃 친구들, 아낌없이 모두들에게 퍼부어 버리자. 


‘이사용포’ 그 넉자가 꽈리를 틀듯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 말이다. 그 포는 품어낼수록 끝없는 환상의 기쁨을 토해내는 인성의 소염제가 아닌가. 퍼내고 또 퍼내도 영원히 말라비틀어지지 않는 콸콸 쏟아지는 폭포처럼 그 말뜻에 넘치도록 담겨 있잖은가. 


순수한 한국적 사자성어 이사용포란, 아끼고 인색할 때 참으로 불편함이 우리 삶을 너무 심란하게 묶혀 썩어드는 곰팡이 같은 것을 암덩이란 심적 화약가루가 가슴을 태우고 있을걸, 이 하루도 눈 지긋이 감고 터트려 내버리자. 그 포성으로 내 주위를 마구 흔들어 버리자.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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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이웃과 친구들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삶의 동행자들이 친구와 이웃이다. 이웃들의 숨 쉬는 소리야 어찌 들을까만, 그들이 꾸려가는 모습들을 날마다 확인하고 산다. 밥은 매끼마다 먹어야 살지만 친구는 만남이 없더라도 생각하며 그리워만 해도 영원히 약속된 것 같은 흐뭇한 관계로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한다.


동서남북 우리집을 이웃한 이들, 복합문화의 산실답게 유럽인, 중동인, 중국인이 함께 매일 대면하고 산다. 각 나라별 특수성을 지닌 그들의 삶을 한인인 나와 양푼 비빔밥처럼 어울려 맛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집은 뒤뜰이 남향이다. 종일 햇빛에 정원수며 사시사철 꽃망울들이 장관을 이룬다. 남쪽에 사는 토니와 캐시 부부, 깔끔하고 아담한 채소밭을 일구어 토마토며 호박, 오이를 재배하여 풍성함이 울타리를 넘어온다. 


우리집 역시 마늘이며 들깻잎들 따고 또 따내도 가득하기에 서로의 손길을 나누며 베풀고 산다. 생전 보지 못했던 풀잎인데 무슨 향기가 이토록 신선하고 깔끔하냐고 놀란다. 바비큐에 싸서 먹는 맛에 흠뻑 빠진 이웃이다. 확인한 바 없지만 지구상에 한국인만 즐겨먹는 특별한 채소가 아닌가?


 폴(Paul)과 수(Sue)라는 이태리 젊은이가 왼쪽에 산다. 수는 안과의사, 남편은 비행기 조종사인데 그들의 직업이 마치 정원사 같다. 뒤뜰이 넓어 여유롭게 온갖 채소를 가꾸며 여가선용에 반세월을 보낸다.


얼마나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지 부럽고 존경스러운 중년 부부다. 심코호의 카티지도 서로 이웃하고 있어 우리는 특별한 인연이라고 끈끈한 정을 나누며 산다.


벌써 초가을의 기온이 말해주듯, 정원에서 가꾼 포도며 고추 같은 것들을 함께 나누자고 울타리 너머로 손길을 뻗친다. 엊그제 무농약 농토에서 재배된 달콤한 옥수수를 넘겨줬다는 감사보다 몇 배 넘치는 친절로 이웃의 정을 쏟아준 것이다.


드높은 단풍나무 이파리와 씨앗이 지붕에 날라와 물통을 막히게 한다 했더니, 순발력 있는 21살 아들을 대동하고 높은 사다리를 들고 와 한순간에 청소해준다.


아들이 어렸을 때 넉넉한 캔디를 예쁜 주머니에 넣어 할로윈의 계절을 함께 하고, 연말연시가 되면 이웃이라 미소를 보였을 뿐인데,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풍성함을 확인하고 있다.


 앞문 밖 마주 보이는 곳에 50대 젊은 부부는 이사온지 몇 년된 중국인이다. 부인은 고등학교 교사요, 남편은 미술지도사로 집에서 방과후 특수화실을 운영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아침 쓰레기 수거일에 자기집 통에 함께 버려도 된단다. 그쪽은 아침 일찍 쓰레기를 수거하기에 매우 유용하고 편리하다. 우리 쪽은 오후에 수거하는 시간이라, 중년부부가 깜박했을 땐 우리 쪽을 서로 이용하기도 한다.


부피가 크지 않는 종이박스며, 음식찌꺼기 플라스틱 용기들, 두 집이 합해도 용량미달이라고 함께 버려도 상관없단다. 역시 미술가다운 세심하고 요령있는 살림꾼이 틀림없다.


앞뒷집 언제든 시간내어 디너시간을 함께하자는 오퍼를 해마다 몇년을 공중에 띄워버렸다. 금년엔 우리가 먼저 제안을 해야겠다.


앞문 밖 바로 정면에 이태리언 싼토라는 마블 전문 건축사가 산다. 한겨울이 되면 눈치우기 힘들다고 통통거리는 제설기로 우리집 차고 입구를 치워준다. 대중교통을 위하여 밀어붙인 산더미 같은 눈을 자기집보다 먼저 밀어준다.


새해맞이 인사로 와인 한 병을 신년인사 카드와 전했을 뿐인데 형제들 우애 같은 이웃 정들이 세상살이 참으로 신나고 즐겁다.


순이네가 엊그제 우리집을 잠깐 들르겠단다. 맛있는 것만 있으면 손수 챙겨 나눠 먹어야 편하다는, 참으로 절친한 친구다. 왕복 200킬로를 달려 허니크리스프(Honeycrisp) 사과를 직접 사과밭에서 따왔단다. 우리몫까지 준비했던 광주릴 들고 전해준다. 별것 아니라며 오히려 미안해하는 겸손함을 보인다. 사각사각 사과 맛이 감칠맛으로 꽉 찼다. 단단하게 영근 사과 맛이 순이네 부부처럼 싱그럽다.


지난 주말 물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명한 농장에 들러 끔찍이도 순이네가 좋아한다는 강냉이 한꾸러미를 전해주며, 오징어볶음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순이네와 저녁을 함께 했다. 세상살이 누가 뭐래도 희망과 기쁨이 매 순간 쏟아지는 축복의 산실인 것을. 


“이 선생님! 지난주 칼럼 잘 읽었습니다. 쉴만한 물가의 별장의 모습들이며, 마리화나의 양성화가 행여 이 사회의 악이 될까, 우려하신 글에 담긴 내용이 가슴에 다가오네요. 또한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겠다고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입니다.” 오랜 친구인 선아 엄마의 독후감이 칼럼의 의미를 살찌워준다.


 글은 이웃에게, 친구들에게 메아리 같은 울림이 되어준다. 음악감상실의 여운처럼 지극한 감성을 자아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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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7
골프의 마력-고달픈 이민생활에 큰 활력소

 

 

▲본인이 올 7월 26일 서밋골프장에서 홀인원을 한 후 받은 증표 

 

 

 

옆집의 친구 내외가 일터를 맡겨두고 골프채를 둘러매고 다니던 70년대 중반이었다. 골프의 ‘골’ 자도 모르던 그때, 아니 아예 “뭘 그런 걸 돈 버리며 하느냐?” 질책을 하듯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빈정거렸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 친구의 표정은 “모르면 잠자코 있어야지, 쓸데없는 참견이냐”고 오히려 불쌍하다는 눈빛이기도 했다.


“이렇게 흥겹고 신나는 운동인데… 이 사람아, 세상 사는 맛이 나니 한번 해 보시게나” 


어느 날엔가, 골프 신발과 채를 준비해서 연습장엘 한번 가보자고 나를 조심스럽게 불러내었다. 역시 싫었다. 바쁘다고 핑계를 댈까! 그렇지만 친구와의 관계란 간혹 싫어도 받아들여야 든든하고 끈끈한 정으로 다져지는 게 아닐까! 못 이기는 척 하고 따라 나섰다.


대충 골프의 A B C를 가르쳐주면서 한번 휘둘러 보란다. 그 딱딱하지만 탁구공 같았던 것이 적당한 무게가 있어 때리면 신기한 매력이 있었다. 당연히 젖 먹던 힘까지 입을 악물고 후려쳐 댔다. 빗나간 공이 태반이었지만 더러는 창공을 나르는 모습이 신통하고 후련했다.


친구 왈, 소질이 다분하단다. 격려와 함께 이토록 맛깔스러운 것을 어찌 거절하느냐는 안타까움이 목소리에 배어났다. 오죽하면 답답한 레슨을 하려고 옆 친구를 연습장에 데려갔을까? 참 고맙고 빚을 많이 진 친구였음을 이 순간도 잊지 않고 있다.


그렇게 배운 골프가 35년을 맞았다. 초원을 걷고 걸으며 세월이 득달같이 달려가는데도 "달려라 세월아, 나는 공만 보련다” 24시간 눈에 공만 어른거린다. 신기하게도 간밤의 피곤에 절은 모습이 확 사라지고, 골프 약속이 있는 아침이면 정신이 말짱해지는 것이다.


언제 피곤했던가. 무엇이 그리 바쁘던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초원을 향한 그리움이 전신을 휘감는다. 무슨 보약일까? 건강식품도 홍삼도 꿀단지도 없는데, 대관절 무슨 청량제가 이렇게도 효험이 있을까? 


생애 4번째 ‘홀인원’ 파티를 간밤에 성대하게 치렀다. 5백 멤버들 틈새에서 14명의 운 좋은 골퍼들이 이뤄낸 경사스런 잔치였다. 그 용사들을 위해 골프클럽의 연말 잔치에서 거창하게 파티를 열어주었다. 


 홀인원 기념패는 물론 가슴에 꽂아준 꽃송이는 축하의 디너파티를 한결 빛내주었다. 몇몇 회원의 홀인원 소감들이 발표됐다. “간밤에 꿈속에서 아내와 함께 하늘길을 산책했던 황홀한 꿈이 홀인원으로 다가왔다” “골프장에 서생하는 야생 터키가 골프백에 숨어 들더라”… 


 “몹시도 찬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이라 후려쳤던 공이 방향을 잃었다. 함께 라운딩하던 이들과 그린 주변을 샅샅이 찾았다. 뱅글뱅글 그린 주변을 서성이다 가 고개 숙여 홀 속을 본 순간, 결국 깃대를 맞고 굴러들어간 공이 이변을 연출했다”고 나의 기쁨과 소감을 발표했다. 


 이날 2백여 회원들이 참석한 디너 파티는 연예인들의 멋들어진 공연과 함께 댄스파티까지 곁들여져 연중 최고의 잔치였다.


 골프는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감당키 어려운 순간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보약이다. 부담스런 값비싼 곳만이 골프장은 아니다. 9홀만 걷는다 해도 심신의 피로를 달랠 수 있다. 고달픈 이민생활에 골프마져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까. (골프를 안 치시는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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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복덕방은 부동산의 교사

 

 

 


 
 예전부터 선생님은 속을 많이 태우는 직업이다. 답답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제자들을 가르치려니 얼마나 육신과 정신이 찌들겠는가?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직업이 바로 교사직이다. 


 순수한 한국어가 겹쳐 있는 ‘복덕방’이란 이름이 사실은 중개인을 일컫는다. 전문인으로 교사의 반열에 오른 직업이다. 살짝 잘못하면 친절의 실종이요, 더 좀 아는 척하면 사기꾼으로 몰리는 직업이라 유리그릇 만지듯 조심해야 한다.


이들의 직업 역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어쩌다 더러는 비상식적 직업의식을 탈피치 못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부동산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하는 부동산업자들도 있었다.


수십 년 전 비행기로 현지답사를 하며 플로리다에 땅을 사라고 치근거렸던 일들, 이곳 나이아가라온더레이크 주변에 땅이 투자용도에 매우 유익하다고 이민자들의 눈을 홀렸던 적도 있다. 그 지역에 투자해서 대박을 터트린 경우도 더러 있었겠지만, 플로리다나 나이아가라의 부동산은 한마디로 뜬구름 잡기 같은 묘수가 뒤따른다.


규제가 각별하고 법규 역시 일반인들에겐 생소하기 그지없이 아리송한 점들이 많다. 지금도 30여년 전에 헐값에 매입한 나이아가라 주변의 땅들, 돌덩이 하나 움직일 수 없이 오크리지 모레인에 묵혀 있는 곳이 많다. 오크리지 모레인이란 특수 지하수 보호구역이란 말이다.


이런저런 매물들에 어찌하면 부동산의 생명인 투자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을까?


안내자는 바로 복덕방이란 선생님으로서의 직업이다. 쓸만하고 건실하게 확실한 매물을 고객에게 최선을 다해 소개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잘나가는 복덕방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노라면 참으로 업무처리 능력에 찬사를 아낄 수 없다. 시간관념에 철저함은 물론, 내 차로 약속장소에 간다 해도 “아니에요, 제 차로 모실게요” 한다. 고급차든 낡은차든 깔끔하게 단장된 그의 모습 속에 정중함과 친절함이 배어 있다.


쇼잉을 할 때 역시 차분하게 설명하며 그의 의견을 곁들이지 않고 액면 그대로 거울에 비춰보듯 부담을 주지 않는다. 묻는 말에만 비중있게 설명해 신빙성을 더하는 반면, 부채질이나 풀무질 같은 마켓상황을 확대하는 행위 역시 모르는 척 겸손하다.


평생 고객으로 끌어 안으리라는 비전이 눈빛과 행동에 매우 인격적임과 동시에 차분하다. 만남의 시작이기에 절대로 최선을 다하리라는 각오없이 어찌 커미션이 내 손에 넘겨질까?


도란도란 평범하기 이를데 없이 편하게, 오래 전에 알았던 친한 친구나 이웃처럼, 또 만나야만 될 끈끈한 인연처럼 믿음과 사랑이 넘쳐난다. 이리도 친절과 배려가 남다른데 어찌 또 다른 중개인을 탐색할까? 


나의 고객으로 평생을 함께 하련다는 중개인의 자산이 뭔가? 신뢰와 겸손이다. 믿음과 예의는 어렵게 구현될 수 없다. 소박하고 순수하게 인간적인 모습이 부드럽고 상냥한 눈길과 손길에 묻어나야 한다.


쇼잉이 끝나고 그냥 헤어질 것인가? 절대 아니다. 천금 같은 시간과 관계의 확립이란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다. 주변 맥도날드의 저렴한 커피향기는 내일을 기약하는 최면제다.


그와 함께 영원히 기약없는 약속의 시간이 몰려있다. 인연을 확대하고 다시 만남의 약속에 정을 쏟아내는 사랑방이다. 우물거리지 말고 커피값이야 뛰어가 절대로 내 몫으로 만들어야 한다. 


내 자동차로 모셨기에 차 문을 열어주고 닫아주는 섬세하고 자상한 그 모습 속에 미래를 꿈꾸는 마스터 키가 달려있다.


사후 서비스가 뭔가? 부담을 피하고 믿음과 친근함의 배려가 바이어의 가슴을 열어주는 통로다. 지천으로 넘쳐나는 부동산업자들의 광고들, 오만 갈래로 펼쳐지는 마켓상황의 변화들에 대처할 수 있는 통로가 있을까? 수많은 경쟁자들의 틈바구니에서 하찮은 내 광고 속의 이름을 찾아낸 고객과의 만남, 이거야말로 천운이 아닌가.


조급하고 성급하게 대면하는 만남이 아니다. 기회를 축복으로 이어주는 안내자의 차분함과 상황인식에 충실한 마케팅이야말로 부동산의 기본이리라. 하늘의 뜻을 받들고 내 직업에 최선을 다할 때, 자동차는 오늘도 매물을 찾아 확보된 고객들의 필요를 맘껏 채워줄 것이다. ‘그물이 삼천 코면 걸릴 날이 있다’고 하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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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4
“카티지(Cottage)를 원하세요?”


 
 물은 생명이다. 물이 없다면 단 한 순간도 우린 생명을 지탱할 수 없다. 그 물의 주인은 절대자요, 세상을 지배하신 창조주다. 때문에 "쉴만한 물가로 너를 인도하는도다" 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기쁨을 선물한다. 내것이기에 나의 권리를 너에게 건네줄 것이며, 너를 깨우쳐 나의 길로 인도하리라는 은혜 가운데 깊고도 오묘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호수의 땅 캐나다엔 쉴만한 물가가 지천이다. 주말만 되면 동서남북 고속도로가 미어진다. 평화와 자유를 즐기는 곳, 바로 별장이란 카티지(Cottage)를 찾아서다.


자자손손 이어 물려받은 가문의 자산이 태반이지만, 필요하기에 별장을 구입해 온 가족이 쉼터로 호숫가를 찾아 향연의 주말을 즐긴다. 투덜대며 불편해 하던 세상살이에 주말만 되면 그래도 카티지라는 쉼터에 머물면 꽃향기 같은 호숫가의 향기가 온가족의 신선함을 부추긴다.


 확 터진 호수 풍경과 감미로운 바람결에 풍겨오는 평화의 내음들. 언제 우리가 힘들었던가? 짜증스러웠던가? 잔잔한 호숫물에 말끔히 씻어버린다. 비단결 같은 바람에 두 손 높이 들고 심호흡으로 희망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모래밭 물가에 잔잔한 피라미들의 홀랑거림은 자유를 즐기려는 생태계의 표상이 아닌가.


 끝이 없는 광활한 호수의 풍성함은 누굴 위한 선물일까? 은빛으로 출렁이는 절대자의 미소가 나와 함께 동행하는 이 순간이 바로 오늘이라 확인하며, 만사를 제쳐두고 안락의자에 누워 감사와 더불어 파란 하늘을 우러러본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허덕였던 심신을 달래고자 아는 분의 카티지를 빌려 한주일 물가를 찾았었다. 젊음이 요동치던 싱싱하고 활기찬 시절이었다. 부대끼며 삶을 일궈가던 그 세월에, 여유가 있었다면 무엇이 얼마나 있었으랴, 그런데도 짜증을 달랜다고 가족여행이라는 휴가를 낼 수 있었으니, 이 나라의 풍토가 우리의 발길도 호숫가를 걷게 한 것이다. 웅크리며 살던 환경에 변화가 오니 어린 두 딸의 눈빛이 호숫물과 함께 더욱 황홀했다.


며칠간의 쉼터, 카티지라는 곳은 생소했지만 호수 나라의 발길, 눈길로 이어진 삶의 패턴은 이렇게 그려지고 있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혁명의 구호만이 아니라, 이민자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나름대로의 생활철학이 충분히 실현될 수 있다는 성취감이기도 했다.


 달콤하고 멋진 휴가를 끝낼 무렵, 호숫가에 취한 우리 가족은 부동산업자를 불러 카티지 마켓을 노크했다. 호수가 좀 넓진 않았지만 카티지 모습이 아담함은 물론, 정원이며 관리된 휴식처가 천국의 집으로 여겨졌다. 와우… 당장 오퍼를 진행, 꿈에 그리던 별장을 우리도 가질 수 있음을 기뻐했다. 


 1년 반 동안, 30대 후반의 젊음이 훨훨 불타던 시절이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렸다. 천사들의 별장 같았지만 실책이요, 미숙한 성급함 같았다. 2시간 반 운전으로 가는 길은 결코 쉴만한 물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켓상황을 미처 의식할 사이 없이 구입한 별장에 투자는 대성공이었다. For sale 간판이 보인지 하룻만에, 새 주인이 될 바이어가 카티지 주변을 샅샅이 서성거렸다. 눈이 휘둥그래진 상태로 바로 이튿날 오퍼를 내밀었다.


1년 전 구입가의 80 %가 오른 거의 두 배였다. 그 시절 부동산시장의 매력치고는 확실한 대박이었다. 4, 5 년 후였던가. 다시 호숫가의 향기가 그리웠다. 


두 딸들도 성장했겠다. 지난번 호수야 조용했지만 시야가 좁은 반면에, 웰워터 라는 필터를 이용한 샘물의 불편함이 싫었다. 2시간 반, 부담스러운 거리였기에, 이번엔 호수가 시야를 더 넓게 펼쳐줄 곳이 어딘가? 


 1시간 정도 되는 곳에 50년 된 헌집이었다. 끝이 안 보이는 심코 호숫가였다. 재건축 허가를 받아 헐어버리고 새집을 지으면 또 대박일 것 같았다. 그러나 심코 호수에 재건축이란, 돌 하나라도 움직이는 허가를 받기가 까다로운 정책을 동반한다. 최소한 1년 이상의 절차를 겪어내야 하는 공청회며 법적 제약 역시 철벽이다. 그러나 결정의 대범함은 만족의 핵심이다. 만족하다는 순간은 매혹의 절정이기도 하리라.


별장의 첫째 조건은 호숫가의 절경이다. 시야가 넓어야 함은 물론, 먹는 물이 안전해야 하며, 수영할 수 있는 호숫가라면 금상첨화다. 겨울 낚시터가 구비된 곳이라면 사계절의 풍미를 더욱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전기며 수돗물과 더불어 가스 난방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환상의 별장이다. 


수돗물 시설이 없는 지역은 지하수를 사용해야 하지만 정수장치를 섣불리 하면, 물에서 클로린 냄새가 심해 북쪽 카티지들의 고민거리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튼, 여러 여건을 고려하고 신중을 기해 카티지를 사두면 그만큼 삶이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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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6
마리화나 자유화가 그리 급한지…

 

 


 
금년들어 유달리 극성을 부리는 무더위로 지구촌이 몸살이다. 우리가 태어난 고향 땅 그곳에도 찜통 더위와의 전쟁터를 방불케 해 아우성이라고 매스컴을 장식했다.


북극에 빙하가 녹아 침수된 바닷물이 넘쳐나 섬나라들의 생태계는 물론 생계 유지에 위협받아 절박한 모양이다. 백년에 한번 필까 말까 한, 마치 무궁화 꽃을 닮은 고구마 꽃들이 피어나는 이변도 생겨나고 있다. 고구마 꽃은 행운을 상징한다는데…


온난화의 수온계가 겨울의 나라 이곳 캐나다 토론토까지 기준치를 상회하는 이변을 속출하고 있다. 왕년엔 한여름 4, 5일 틀었던 에어컨이 두 달 이상 아예 온도계를 고정해두고 한여름을 견뎌야 했다.  


온난화가 지구촌을 위협하는 데도 그런 자연의 섭리엔, 과학문명의 손길로는 아예 손을 쓸 수가 없다는 지경에 이른 것인가? 훌러덩 옷을 벗어 던진 모습들 길거리마다 요란하다.


 스트레스가 넘친다. 불쾌하고 끈적이게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열기로 몸살을 앓는다. 해마다 이럴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혼란을 부추기려는 듯 기쁜 소식은 아니다.


Adult village가 넘쳐 난다는 뉴스도 있다. 옷을 벗고 물놀이로 폭염을 달래고 있는 곳이 미어지는 모양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중엔 그 모양이 최고일 것 같은데, 뭘 먹고 살아야 용기백배 남의 눈길 아랑곳 없이 남녀가 그 모습으로 모래사장을 활개칠까?


마리화나가 시중에 범람하려는 모양인데, 그걸 피워대면 걸쳤던 옷가지마져 팽개치려나? 인간들이 옷을 입는 것, 만인을 위한 예의요 상식이 아닌가. 


저스틴 트뤼도가 마리화나 시장을 확 열어 버린단다.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라고 이 나라를 모두 벗게 만들려나. 폭염일까. 마리화나일까? 끈적거려 열불 나게 찌는 더위가 동장군의 추위보다 훨씬 강력한 파워이구나 싶었는데. 


마약의 기본이 마리화나라는데, 이거야 원 헷갈려서, 과연 당연한 정책일까? 마약소유죄로 사형이라는 최고의 법적 제재까지 집행하는 곳도 있는데 유독 캐나다만 어찌 거슬려 가려는가? 

 

해롱해롱 초점 잃은 눈으로 자동차를 몰고 다닐 것은 뻔한데, 어찌하려고 몰핀의 씨앗을 우물거려도 좋다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들이 곧 닥칠 모양이다.


신기하고 환상적이라는 학교 친구들의 꼬드김에, 뒷전에서 수근거리며 피워대던 환각의 요물들이었다. 이제는 히히덕거리며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대놓고 피워댈 수 있을 것이니, 이 나라의 자의적인 평화라고 기쁨을 즐기려는 것인가?


 염려와 불안만이 아니다. 도덕과 치안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적립되어 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가? 훌러덩 벗어 던진 모래사장의 자유와, 해롱대는 눈빛으로 세대를 희롱하는 평화에 대해 매우 혼란스럽다. 자유와 평화는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라고 행여 교육과목에 실을 것인가?


멋 모르고 뻐끔거리다가 패가망신한 눈에 띄는 사람들의 허덕이는 모습들, 측은하고 안타까움에 동정도 도움도 애처로웠는데, 이것 참 야단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참상이 이 시대에 재연되려나?


시대적 물줄기가 겨우 마리화나의 개방으로 신세대를 아우르려 하는 거라면, 정치적 타산에 발맞추어 국민성을 난도질한다는 건데, 보수와 진보가 어우러져 두 손가락에 끼워 피우려는 마리화나의 연기에 눈을 꿈뻑일 모양이다.


아침 저녁으로 가을이 밀려드는 시절의 변화를 거부할 수 없듯이, 이 나라 마리화나의 정책 역시 손사레를 칠 수 없는 것인가? 이 일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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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8
일기장을 뒤적이며

 
 
얼마 전에 대학노트에 빼곡히 쓰여졌던 학창시절의 일기장을 미련없이 버렸다. 가치 평가의 수준이 미달해서도 아니었다, 애지중지 때묻은 애환의 설움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허지만 이제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기억들이 전설은커녕 오히려 회한의 뿌리들로 우울한 환상만을 자아냈다. 


그 옛날의 이야기들은 오늘의 내 삶에 부담스럽게 심란하고 어설픔이 배어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때 그 시절의 한이 서린 나의 모습들이 뒤적거릴 때마다 다시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거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것 하나 풍족하지 않았고, 찌들은 가난의 후예들이었다. 상상하기 조차 불편하고 처연한 안타까움이 머리를 흔들게 했다. 분명한 것은 그 일기장에서부터 읽고 쓰기의 습관이 길러져 왔다,


그렇지만 쌓여 묵혀있는 서랍 속을 비워버렸다. 무려 대학노트 다섯 권이나 되었다. 스스로의 생각과 마음속을 털어내어 요원했던 격동의 시절이 질서정연 하게 표현된 일기장들이었다.


50, 60년대의 흙과 바람 내음이 고스란히 배어있던 일기장이었다. 나를 표현하고 정리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함을 절대로 감사해야 할 것을… 그런데 왠걸 그 헐벗고 심란했고 암울했던 옛 시절이 싫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감사할 것이 있다. 학교 친구들과 책들을 서로 돌려가며 함께 읽고 독후감들을 써서 발표해봤던 동인지 활동이었다. ‘능암’(언덕 위의 바위가 되자) 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독서 친구들의 작품집이었다.


인쇄기를 등사기로 사용했던 그 시대의 모습, 요즘 컴퓨터 세대는 무슨 단어 일까? 알 수도 없는 외래어로, 그래도 그것으로 이 세상은 밝혀지고 있었다. 시 와 수필, 단편과 콩트들이라고, 그래도 글쓰기란 낙서들이 주섬주섬 일기장에 담겨 있었다.


"우리 엄마 아빠의 새벽은 일터다. 논두렁 밭두렁이에 먹을 것들을 가꾼다."


"아빠의 장날은 술에 취해 휘청거리면서도, 양손엔 생선이 들렸다. 취했어도 5일마다 물고기 반찬을 꼭 챙기신다"


"밖에 빗소리가 새벽을 깨워 아빠 엄마의 소곤대는 이야기가 잠을 깨웠다. 다툼인가? 들리는 소리는 논과 밭으로 지혜를 모아 쏟으려는 대화들이었다."


"룡이란 녀석, 내게 빌려간 책을 오늘도 깜박 잊고 안가져 왔잖아,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가 다정한 내 친구 아닌가. 내일은 잊지 않겠지!"


친구 집에만 가면 친구엄마는 쪼들린 생활을 쥐어짜 먹을 것들을 삶아낸다. 고구마였다. 한 광주리 사다가 양판 속에 푸짐하게 쪄내시며 "많이들 먹어라!"  아들 친구들에게 인기만점이셨다. 어찌 그리도 배가 고팠던가?


죽순처럼 자라나는 세대가 아니던가, 그때 그 고구마가 아니었으면 아마 내 키가 지금보다 몇 센티는 못 컸을 게다. 못 먹어서, 그때는 라면이 나오기 직전이었으니 더 허덕일 수밖에. 한 많은 가난이여!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여름, 겨울 방학 때였다. 자활 능력을 체험하자는 기발하고 대담한 발상이었다. 생활용품들을 구비해 농어촌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비누, 연필, 치약, 칫솔 등등 들쳐 메고 골목길을 뒤지며 고학생 역할을 실제로 경험했다.


배우려고 학자금을 조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민심의 동향파악으로 국민적 정서를 확인하여 보려는 소년시절의 값진 이력서였다. 인간세상의 접촉으로 친근함을 배양하고, 대범함의 이치를 깨우치려는 소년시절의 절박한 투신이기도 했다.


 ‘구리무’(피부크림)며 성냥, 초 등의 농촌생활에 필수품들을 팔고 다녔다. 현금이 없다고 곡물로 값을 계산해주는 농촌의 풍경이었다. "아이고머니나!" 학생들이 공부할라고, 세상에나… 있는 것들 더 주고 싶어하는 인정이 차고 넘쳐났다.


한여름 방학을 풍성하게 값지고 진귀한 생활체험으로 유익하고 멋진 젊음의 추억이었다.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은 한국사의 ‘탈무드’에 등재한다 하더라도 분명 성현의 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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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장작불과 모닥불의 사랑

 
 
 한국의 예능 방송을 가끔 시청한다. 얼마 전 부부살이의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은 프로를 보게 되었다. 놀라웠던 사실은 부부학 강의를 하는 강사의 고백이었다. 전공분야임에도 도전에 직면하여 헷갈리는 어려움이 부부생활임을 실토한 것이다.


평소 하루에 네 다섯 번씩 부부의견이 충돌하는 모양새를 겪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헤어지면 끝나는 것 아니냐는 방청석의 의견에, 혼자 사는 것보다는 하루10번을 토닥거려도 아내가 있어야 좋단다.


다툼은 헤어짐의 불씨가 아니라 부부사랑을 확인해가는 기본이요, 과정이라는 것이다. 토닥토닥 장작불 타는 소리가 없으면 불길이 타오르지 않는다는 이치요, 논리다.


투덜대는 부부가 아니라면 사랑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론과 상응하는 말이다. 불만과 불평의 원론적 주장은 아직도 상대의 의중에 나를 포기할 수 없어 절충하려는 과정일 뿐이다.


뭔가의 생태적 의견충돌이란 바로 사랑하련다는 의식적 발로요, 잠재된 사랑의 함축성이 좀 거세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찌그럭 찌그럭, 토닥거린 사랑의 불꽃은 부부생활을 원활하게 추스르려는 소화제요, 영양제의 효능을 발휘할 것이다.


 생판 서로 아무 것도 몰랐던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서로 손길 한번 마주친 적 없었던 인연 속에서 무슨 각별함인지 부부가 되어 귀한 자식들과 함께 알콩달콩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


잔주름들 헤아릴 틈 없이 먹고 사는 것 해결하며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함께 겪으며 살았던가. 힘들었기에 짜증부리며 한숨 쉬며 눈길에 밟히는 남편이요, 아내 아니던가.


흉허물 없는 편안한 관계였기에 입 속에 있던 것까지도 꺼내어 나눠먹을 정도로 아무것도 계산할 필요 없는 관계가 바로 무촌(無寸)인 부부다. 그래서 할말 못 할말 하다 보니 눈길이 험해지고 목소리가 커지며 이것저것 따지고 들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큰 변이나 날 것처럼 양말짝이 왜 이렇게 굴러다니냐? 부엌에 설거지가 왜 이렇게 엉망이냐?. 그렇다. 살다 보니 부부생활의 기본이 눈살 찌푸리는 관계들의 연속이다. 


 서로 철저하게 속물 같은 인연으로 함께한 남녀관계다. 오죽해야 부부관계는 험악하게 말해서 악연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둘이서 서로 포용하고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가 해줄 것인가? 자식 새끼들 없었을 때 첫사랑의 눈빛만 상상해보자.


무지갯빛이 사랑의 눈빛보다 더 아름답던가? 보이는 색깔의 자연현상과 남녀간의 연정이란 가슴속에 숨겨진 천태만상의 색깔과 어찌 견줄 수 있을까? 애정의 불길 속엔 토닥거림도 필요 없다. 불길도 없는 뜨거움의 정체가 바로 남녀간의 위대한 사랑이 아니더냐 말이다.


 두근두근 가슴이 철렁거리던 그 순간의 눈빛이 겨우 일년 반이란다. 일년 반으로 평생의 투덜거림을 통달하라는 초자연적 남녀 관계가 부부라는 인연이다. 그때 그 시절로 평생 살아갈 정신적 육체적 양식을 부축해야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대 하나만이 전부였던 첫사랑의 시절 말이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사랑으로 포용의 양식, 이해하며 용서의 양식, 배려와 나눔의 양식, 노력으로 성취의 양식들을 비축해둬야 했다. 18개월의 눈멀었던 사랑이었다. 참으로 뜨겁고 황홀했던 추억이 그대와 나에게 메아리처럼 여운으로 숨쉬고 있는데 무엇이 그리도 겁날 일 있으랴.


훨훨 타는 장작불에 구워지지 않을 것들이 있던가! 토닥거림의 불길 속에 눈에 밟힌 부부간의 찌꺼기들 다 태워버리자. 토닥거림이 없는 불길이 바로 모닥불이고, 화롯불이다.


곧 꺼져가는 불씨도 잿더미에 깨끗이 잠재워버릴, 원성과 불만의 씨앗마저 모두 없어졌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흥얼거림으로 노래하자.


그토록 알뜰히 사랑에 취해서 함께 살자고, 주례 앞에서 손가락 내밀며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겠다고 약속했지 않았느냐 말이다. 그렇다면 웬만한 건 눈감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그리 잠자리는 뒤척일꼬? 코는 왜 그리 고는가? 하루 이틀 살아온 것도 아닌데,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며 들볶아서야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살 건가.


당신 없는 세상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던 인연, 붙잡고 늘어져 환성이라도 질렀다면 책임도 감수해야 하잖은가. 


“여보! 어제 당신 피곤했수? 오늘 푸욱 쉬어요. 밀린 집안일들 내가 하리다.” 꿀물처럼 달콤한 한마디가 백년해로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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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3
훈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선불 15만 불에 정기적으로 해마다 1만불씩, 동포장학재단을 후원하련다는 약속이다. 서툴고 어설픈 정원사 일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파트타임으로 푼돈을 만들어 학업을 유지했던, 존 박이란 사나이가 펼쳐 보인 삶의 노래다.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부모님의 상황을 직시한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캘리포니아에서 내과 전문의 과정을 이수했다. 험난한 의학계의 과정들을 넘고 넘어 우수한 성적으로 학위를 취득하여 전문인의 입지를 다져갔다.


그는 아버지의 죽마고우의 여식인 애리 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2남1녀의 가정을 아름답게 꾸며가고 있다. 아내인 박애리, 예일대 법대를 수석 졸업한 수재다.


회사경영 전문변호사로, 캘리포니아 유명 로펌에서, 캐나다펜숀 투자관리 업무까지 총괄하는 국제변호사다. 그녀의 당차고 기발한 업무처리 능력은 전문의인 남편을 능가한다니, 부부의 활기찬 패기와 돌파력은 타의 추종을 뛰어넘는, 신세대의 거울이요 모범적인 우상임이 틀림없다.


이제는 그들을 낳아 성장시킨 부모의 은혜에 보답할 순서를 찾은 것이요, 꿈을 여물게 한 고향땅 토론토의 장학재단을 지원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빠 엄마의 이름으로 거금을 후원한 것이다. 이 얼마나 대견하고 모범된 일인가.


그의 부모는 박하규, 박선근 님. 박하규 박사는 토론토대학 조직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다년간 저서활동은 물론 영혼구원 사역에 부름받은 분이다. 명문 전주고를 수석 졸업 후, 서울대 문리대 수학 도중에 중단하고 한국신학대학으로 전입해 창조자의 증언대에 올랐다. 부모님의 빗발치는 반대로 학비지원까지 중단해 버렸지만, 끝까지 불효했던 결과 조직신학박사가 됐다. 


현재 88세 노령이지만, 번뜩이는 눈빛은 총칼이 인권을 짓밟았던 시절에 해외 민주화의 선봉장이셨던 기개가 서릿발처럼 이글거린다. 한동안 입국금지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핍박과 억압의 처절한 아픔을 견뎌내신 숨은 영웅이다.


내과의사 존 박은 억만장자의 대열에 서서 이런 삶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의지적 용단과 꿈틀대는 결단의 산물이다. 격려와 사랑의 실천이요, 기쁨을 노래한 베품과 나눔의 행위일 뿐이다.


 돈이 남아나서 후원한 것이 절대 아니다. 필요한 곳이 어딘가? 우리 함께 장학이라는 실증을 경험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감에 우선 선택한 것뿐이다. 이 사회가 베푼 복지정책에 힘입어 입지를 굳혔다고 빚을 갚는 것 역시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후원자들이 발벗고 나서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존은 고백한다. “기회는 붙잡는 자의 열정적 노력과 결과로만이 바람직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또한 “그 기회를 포착하는 순발력을 부여받은 이 사회의 환경이 나의 입지를 마련해준 것”이라고… 


부모님의 확실하고 애절한 염원이 자손대대 이어져 있었기에 성취의 완성을 이루었으며, ‘나누며 살라’는 가훈이 나의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다. “어쩌면 생태적 리듬의 유전학적 인자가 나를 감싸주는 것이 아닐까. 잊지 못할 벅찬 감사를 부모님께 드린다.” 


아프리카의 불우 아동과 탈북새터민들의 처절한 삶의 모습들, 외면할 수 없기에 잠결마저 뒤척이며 자선행위에 손길을 뻗쳐야 했다. 


 캘리포니아 역시 어려운 이웃이 많다. 그래서 Parks family 재단을 결성하고, 뜻에 동참하는 이들과 어둠을 밝히는데 열성을 다하고 있다. 아! 어찌 10만 동포들의 귀감이 아니랴. 


 지난해 동포사회에서 들끓었던 무궁화양로원 건립기금 350만 불 모금의 환희를 우리는 실증했다. 단 몇 개월 만에 목표액을 훌쩍 넘기는 기적같은 경이로움을 보았다. 5대호의 호숫물처럼 넘실대는 저력이 가득한 이곳 토론토다. 


 존 박, 애리 박 두 분의 알뜰한 가정 위에 날마다 넘치는 기쁨으로 충만하길 빌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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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3
주검의 소리

 
 
먹은 돈이 많고 적음에 목숨을 던진 것 아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최소한의 안면 몰수는 하지 않겠다는 결단과 각오를 스스로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를 실수로 챙겼지만, 평소 주장하며 소신을 피력했던 나의 역동적 삶의 모습에 진흙을 발라야만 하느냐고 반문하며 나는 내 몸을 던졌다. 


민의를 대변한다는 정치인들이여! 내 주검의 소리가 들리는가? 정치바닥에 혀를 날름거리는 경제단체 핵심 인물들이여! 치맛자락이라도 붙들어 사리사욕에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이여, 내 죽어가는 영혼의 소리를 들어라. 이제라도 무엇으로 이 나라의 불의를 뿌리뽑고 정의롭게 세상을 밝혀갈 것인가. 자신이 없는 자들이여, 내 뒤를 따르라. 


수백 년 조선 민족성의 나약하고 무모함에 과감하게 반기를 든 그의 창연한 성품은 양심의 빛과 그림자를 펼쳐 보인 것이다. 그의 영혼의 울부짖음으로 이 혼탁한 한국 정치, 경제, 교육계를 망라한 모든 영역에 횃불이 밝혀지려나.


구태의연한 헌정 질서와 사회전반에 널려있는 쓰레기 같은 악습을 타파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태우던 한 정치인의 죽음의 소리에 온 나라가 비통함과 안타까움, 애끓는 통탄함이 몇 주일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귀하고 값진 목숨을 버리면서 병들어 썩어가는 조국의 현실을 통탄해하며 4천만 원의 돈다발을 시궁창에 던졌다. 칼날 같은 성품과 비단결 같은 그의 양심으로, 몇 천만 원의 뇌물을 챙기는 것보다 떳떳했을 것이다.


수 억원 정치자금을 받고서도 눈빛을 흘겨 뜨며 수갑을 차고도 거짓말이 입술에 발려있는 정치인들의 몰지각한 행태와, 불합리하게 변질된 사회적 온갖 비리들의 온상을 뒤엎을 수 없다는 실망과 회의가, 던져버리자 이 한 몸, 노회찬 국회의원의 주검의 소리가 메아리 되어 한반도를 울리고 있다.


아니 그의 버린 생명이 파란 하늘빛으로 동녘이 밝아오는 듯 희망을 태동 시킬까? 빛 좋은 이상을 꿈꿔본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살신성인의 대열에 과감히 뛰어든 그의 영혼의 소리를 이 사회가 외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까짓 4천만 원이 아니다. ‘탈무드’의 자손 유대인 친구들의 생활철학을 곁에서 봤다. 함께 길을 걷다가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는다. 호주머니에 넣겠지, 왠걸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둔다.


놀라워라, 아니 네 것이 아닌가? 묻는 내가 한심할뿐더러 몹시 부끄러웠다. “내 것이 아니란다” 주인이 나타날까? 아니란다. 누가 주워가도 내 맘이 편하단다. 탈무드의 교육일까? 지혜의 산물일까? 


그는 교육자다. 그에게 교육받고 자란 이곳 캐나다의 자녀들, 무슨 선물을 받든 한국 아이들처럼 “이게 진짜예요?”라고 묻지 않는다. “탱큐” 만이 입에서 함박웃음으로 감사를 표한다. 뿐인가. 장애인들을 위한 자동화된 문을 아빠가 사용하는 걸 보고, 아들이 말한다. “아빠는 장애인이 아니면서 왜 그 버튼을 누르세요”라는 것이다.


단군의 자손들은 뭘 보고 배웠나. 탈무드가 도덕책으로 정규교육을 시켜도 될성 싶은데.


 노회찬 의원, 그의 손으로 만진 별것 아니라는 떡값의 실체는 드루킹이란 요상한 범행이 법적으로 증명되리라 믿으면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젊음을 불태웠던 그의 탁월한 신념과 의지력으로 한국 정치사에 변화와 희망을 접목시키려 했던 투쟁의 불꽃이 다시 되살아나야 할 것을, 그의 주검의 소리가 영원히 온 국민들의 귓가를 울려주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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