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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창섭 詩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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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
황혼의 명상-이진엽


 

황혼의 명상
- 이진엽

 

 

새들은 서쪽으로 날아가고
회색의 능선 위로 노을이 물들고 있다
빛에 휩싸인 저녁구름
어떤 놀라운 신비가 성냥을 그으며
내 가슴을 불태웠다
이 큰 우주 속에
지금 나는 어떻게 있는가
황혼아 짙어 갈수록
끝없이 헝클어지는 만상의 몸짓 앞에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쉬어라, 이젠
저 먼 산마루 위로 별이 또 뜨리니
마침내 아이들도
숲길의 작은 집에서 곤히 잠들 것이다

    

 


 1956년 경북 구미 출생
 199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경북 하양 무학고교 교사 역임
 시집; <아직은 불꽃으로> 

 

 


 쉬어라, 이젠

 

  능선 위로 물드는 저녁노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이 시의 배경입니다. 성냥불을 그어 댄 듯한 붉은 노을이 시인의 가슴을 불태우며, 어떤 놀라운 신비가 그의 마음에 감동으로 전이됩니다. 시인은 큰 우주 속의 한 작은 존재로서 인식되며, 그 경이롭고 경외함에 무릎을 꿇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느 시에서 볼 수 있는 정경과 심상을 그려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쉬어라, 이젠’ 이라는 짧은 시구에서 독자는 카타르시스가 됩니다. 현실적인 삶의 고단한 짐을 벗어 버리고 싶은 심상을 잘 표현한 구절입니다. 하루 혹은 일생의 노동을 마치고, 이제 노을이 지고 어둠이 밀려오면 산마루 위로 별이 뜨고, 놀라운 신비 (절대적 존재 / 자연의 섭리)는 우리를 포근히 안아 주어, 우리는 휴식의 시간으로 들어 갑니다.


 그리고 숲길의 작은 집에서 아이들도 곤하게 잠이 듭니다. 이 마지막 결구는 폭 넓은 감동으로 다가 옵니다. 우주와 나만의 교감에 도취한 자족의 경지를 넘어, 자라나는 새 생명과 큰 우주와의 신비로운 하모니를 노래함으로서, 시적 울림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진엽 시인은 시의 주제에 있어서는 현실 인식을 삼투시키면서도 언어가 지닌 울림과 향기를 섬세하게 투영해 내는 솜씨가 돋보인다.”고 문학평론가 김재홍 교수는 평합니다.


 ‘우주’라는 시어의 선택은 새로운 느낌을 주며, 더 넓고 깊은 의미로 확산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립니다.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오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희망과 사랑과 미래를 안겨다 주는 ‘아이들’, 숲길로 접어드는 작은 집에서 곤히 잠이 드는 우리 아이들은 희망과 사랑이 있는 우주 공통체의 미래를 꿈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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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30
그런 모름-강옥구

 

그런 모름 
        - 강옥구

 

 

 

우리가
몰랐다고 말할 적엔
아는 것,
아주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조차 모르니까.

 

그런데
꽃이 그 아름다움을
산이 그 의연함을
어진 이가 그 착함을
모르는
그런 모름이 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눈빛
종소리
한 줄의 시
그들은
그러한 모름에서
길어 올린 생수이다.

 

-------------------------------------------------------------

 

          전남 광주 출생 (1940 ~ 2000)

[현대문학] 시 등단
                [문학사상] 북미 통신원 역임
       시집 <허밍버드의 춤>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정말 모른다는 것은 모르는 것조차 모를 때를 말하겠지요. 그와 같이 꽃이 그 아름다움을, 산이 그 의연함을 모르듯이, 어진 이가 착함을 행하면서도 그 자신은 착한 줄 모르는 것, 바로 그것이 진정한 착함이라고 시인 강옥구는 말합니다.  장자도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이 도(道).” 라고. 
   

진정한 부처는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에, 부처는 누구인가, 아니, 부처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부처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부처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참선과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처의 유혹에 빠질 것입니다. 해서 달마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합니다.  부처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 마음을 죽여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가 되고 싶은 욕망은 이미 부처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말한다면, “만약 그대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그대는 결코 천국에 이르지 못하리.” 이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그 욕심이 이미 천국백성으로서 자격미달이라는 말입니다.  


   시인은 결구에서 나직이 말합니다. 무엇을 보이고자 혹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서가 아닌, 마음씀이 없는 <그런 모름>에서 길어 올린 한 줄의 시가 우리를 감동시키고, 목마른 삶을 적셔주는 생수라고.


   그의 수필집 <마음없는 마음의 길>의 제목처럼 무심의 경지를 향해 높고 깊고 넓은 도의 길을 걸었던 강옥구 시인은 시뿐만 아니라 수필가와 번역가로 활동했습니다.  선불교의 ‘무심/무공’의 세계와 크리슈나무르티, 달라이라마와의 만남을 통해 ‘진리/ 자유’의 문제에 천착해 왔으며 작고하기 전까지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인 시인이자 참선자였습니다. 강옥구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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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4
[변창섭 시평]사이-박덕규

 


사이
           - 박덕규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1958년 경북 안동 출생
 <시운동> 동인으로 시작 활동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시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사이 사이에 사이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 갇혀서 산다/ 어떤 형태의 우리이든 우리는/ 우리 안에서 산다” 


 이렇듯 우리말에는 동음이의어가 많습니다. <사이> 도 그렇습니다. 시를 다시한번 읽어 봅시다. 우선, 첫 연 (stanza)을 보면, “사람/사이/있다/싶다”라는 단지 네 마디의 단어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짧은 문장에 세번이나 나오는 <사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이 시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첫 줄의 <사이>는 ‘집과 집 사이에 길이 나 있다.’라고 할 때의 ‘사이’로써 공간적 의미를 지시하며, 둘째 줄의 <사이>는 ‘영자와 순자의 사이가 좋지 않더라.’와 같이 사람들이나 집단들 혹은 국가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심리적 상황을 의미합니다. 셋째 줄의 <사이>는 위의 두 의미가 합쳐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첫 연은 걸끄러워진 사람들, 집단들 또는 국가들 간의 사이(관계)를 화해 시키려고 그 <사이>에 있고 싶었는데, 오히려 양쪽에서 욕만 먹었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나’일 수도, ‘너’일 수도, ‘그’일 수도 있는 이른바 무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상황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다. 이러한 세상살이의 한 면을 이 시는 단지 네 줄의 짧은 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의 맛입니다. 만약 이것을 길게 늘여 한 편의 수필로 썼다면, ‘그거야 다 아는 얘기 아닌가’하고 실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시와 산문과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이 시는 시각적으로도 새로움을 보여 줍니다. 첫 연의 세 줄이 모두 사이를 띄워 놓고, 둘째 연의 “돌”에 맞춰 시작합니다. 따라서 둘째 연의 “양편에서”라는 말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사족으로, 이 시를 ‘사람’ 대신에 다른 말을 대입해서 연습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 Q ]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 A ]이 날아왔다]”는 식으로…


 Q 1; 여자들, Q 2; 남자들, Q3; 남녀, Q4; 중미 


 A1; 손톱, A2; 입술, A3; 윙크, A4; 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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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7
세상 속으로-이기철

 


세상 속으로
- 이 기 철     

 

 

나는 오랫동안 풀꽃의 생애를 노래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인사에 대해서 노래하련다
이제 내 몸이 바라는 곳, 눕고 싶은 곳은
산이 아니라 물이 아니라
병이 있고 근심이 있고 자주 흰 걸레를 더렵혀야 하는
마룻바닥이 있는 집
여름에는 퇴근 길에 수박을 사고 
월말에는 세금을 내러 은행에 가는 마을
이제 나는 이념에 물들지 않은 나무보다 이념을 구겨
호주머니에 넣을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선계의 산정보다 아직 청소차가 오지 않은 골목들이 좋다
등을 켜고 다가오는 별을 보면
진흙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정겨워진다
제도가 있고 공장이 있고 못 만날 약속이 있는
집 옆에 집, 아, 사람이 살고 있다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영남대 국문과 교수 역임
 시집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등

 

 


아, 사람이 살고 있다

 


 이기철 시인은 학자와 시인의 두 길을 함께 가고 있는 영남의 서정시인입니다. “서정시에의 귀환은 내 주위의 모든 여리고 애틋한 것들의 참다움과 아름다움을 점차 크게 보이게 한다.”고 서정시로의 회귀를 천명한 그는 자연의 조화로움을 노래합니다.

 

 

언덕 너머에 집이 있고 길 건너에 물이 있다
 배추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어져서는 안된다
 인간의 말은 너무 난해해
 소들은 풀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귀를 대고 산다
 안 보이는 곳에서 샘물이 솟고
 벌레들은 해지기 전에 가시나무 울타리에 집을 짓는다
 가본 길만 길이 아니다, 어둠 속으로 뻗은
 가보지 않은 길은 얼마나 깊고 싱싱한가
 그곳에 흩어진 마음 조각들이
 저들끼리 모여서 노래가 된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에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의 화해로움을 통해 인간들 서로가 화해함으로서 인간성을 회복하여 참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세지를 전합니다. 


 “그의 시는 자연의 옷을 입고, 자연의 신발을 신고 더 높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지상에서의 구도자의 노래”라는 평이 주어집니다. 그의 구도자의 노래는 선계의 산정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 병과 근심이 있는 우리들 마을, 집 옆에 집, 골목 안에 사는 사람들의 노래인 것입니다. 이념에 물들지 않고, 이념을 구겨 호주머니에 넣을 줄 아는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오늘은 남과 북이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날입니다. … “아,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네.” 사반세기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녘 땅을 밟고 한 말입니다. 가수 안치환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4.3, 4.16, 4.19… 4월은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오늘 4.27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다시 만나, 70년 분단의 고리를 끊고 하나되는, 감격의 <그날>을 향해 물꼬를 트는 역사적인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 이기철의 <작은 이름 하나라도>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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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4
[변창섭 시평]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서울의 예수> 등 

 

 

 

 

한방울 눈물이 된 사람


 많은 시인들이 사랑에 관한 시를 쓰지만 정호승 시인 만큼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시인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제목을 포함해서 이 시는 <사랑>이 열 한번 반복됩니다. 다음으로 <사람>이 아홉번 나옵니다. 사랑의 대상이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사랑과 사람은 순수한 우리 말로, 받침의 ‘ㅇ’과 ‘ㅁ’만 다를 뿐입니다. ‘ㅇ’은 구슬 같고 ‘ㅁ’은 바위 같습니다. ‘ ㅁ’은 한 곳에 듬직히 있어야 할 것 같고 ‘ㅇ’은 영롱한 빛을 띠고 굴러서 달아날 것만 같습니다. 잠시 옆으로 흘렀습니다.


 그의 시는 아름답고 따뜻합니다. 그의 시가 아름다운 것은 <슬픔의 따뜻함>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슬픔이 따뜻할 수 있는 것은 시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일상으로 돌아온다면 슬픈 것이 어떻게 따뜻하며, 따뜻한 것이 왜 슬프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따뜻한 슬픔>이라는 이 모순된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시 속의 <그늘>은 <슬픔>의 다른 이름이고, <햇빛>은 <기쁨>의 다른 이름입니다. 슬픔과 기쁨이 적대적이지 않듯, 그늘과 햇빛도 적이 아닙니다. 항상 좋기만 하거나 항상 나쁘기만 한 것은 없습니다. 선하거나 혹은 악한 것 그 어느 한편에 영구불변히 고정되어 있는 것 또한 없을 것입니다. 그의 시가 이분법적인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단순논리로 떨어지지 않고 아름다운 것은 이 진부함의 너머를 건너다 보는 시인의 눈 때문입니다.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은 한데 어우러질 수밖에 없고, 어우러짐을 통해 그것들은 좋고 선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기쁨은 슬픔이 있어 의미가 있고, 햇빛은 그늘이 있어 의미가 있다는 시인의 말은, 이 신념이 바탕이 될 때에만 비로서 시적인 진술이 됩니다.


 눈물을 아는 자만이 진실한 기쁨과 사랑을 압니다. 눈물과 슬픔은 <사랑>을 낳는 밑거름입니다. 배가 부른 자들은 배고픈 자의 고통을 모르고, 기쁘고 행복한 자들은 슬프고 불행한 자의 밑바닥에 있는 서러움을 알지 못합니다. 서럽고 힘든 고통을 경험한 자들만이 남의 슬픔에도 눈을 돌릴 줄 압니다. 그러므로 <슬픔>은 남들의 처지에 눈을 돌리게 하고 그들의 애환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사랑>의 시작입니다. 스스로가 눈물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줄 압니다.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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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변창섭 시평]세족식을 위하여-정호승


세족식을 위하여

    -정호승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물 속에 발을 담글지라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마라

 

지상의 모든 먼지와 때와
고통의 모든 눈물과 흔적을 위하여
오늘 내 이웃의 발을 씻기고 또 씻길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이제는
사랑의 형식을 가르치지 마라

 

사랑은 이미 가르침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밤마다 발을 씻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거짓 앞에 서 있다

 

가르치지 마라 부활절을 위하여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

 

 

정호승 

 

 

 

부활절을 위하여


 스무 줄로 된 이 시는 사랑이라는 말이 열번이나 반복됩니다. “사랑”! 하도 많이 듣고 말하고 노래까지 불러대, 이젠 그 의미와 감정마저 희미해 지고, 닳을대로 닳아버려 천하게까지 들리는 말, 사랑! 그 사랑에 대해 시인은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사랑법에 대해 시인은 말합니다.


 ‘세족’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힘겹고 고단한 삶에 지치고 더러워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고 어루만져 주는 사랑! 아, 그것이 성자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내 발은 세상의 더러운 물 속에 담가놓고 이웃의 발을 씻긴다고 성자의 사랑을 실천했노라 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거룩한 사랑을 위하여 천한 사랑을 가르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이미 가르침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 라고 시인은 사랑의 형식만을 가르치는 이 시대, 이 믿음의 시대의 위선을 비판합니다.


 그는 그의 또 다른 시 <서울의 예수>에서 “인간이 아름다와 하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는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라고 예수의 사랑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매주마다 모여 사랑을 가르치는 것을 봅니다. 지금 예수는 사랑을 가르치는 그 불켜진 방을 들여다 보며, 붉은 벽돌벽에 기대어 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밤마다 발을 씻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너희들의 사랑은 거짓 앞에 서 있느니라.’ 사랑을 가르치기 전에 네 발부터 씻을 지어다.


 사족으로,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교회에서 아이들은 알룩달룩 예쁘게 달걀에 색깔을 입힙니다. ‘부활절과 달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물고기나 새들은 알에서 부화되어 다시 태어납니다. 사람도 어떤 깨달음이나 사랑에 의해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부활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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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5
[변창섭 시평]완전한 삶-김광규

 
완전한 삶 / 김 광 규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썼다가
지워버리고
생각나면
떨쳐버리고
그러면서 칠십 년 참고 견뎌
선종했다
한 평생 차지했던 자리 
고스란히 비워주고
말도
글도
남기지 않은 채

 

 

 

      

 

 

1941년 서울 태생
1975년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
한양대 독문과 교수 역임
시집 <물길> 등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요즘 모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 ME TOO 운동이 그것입니다. 연극 연출가, 영화 감독, 영화 배우, 대학 교수, 캐톨릭 신부, 대형교회 목사, 심지어 대시인 En선생까지! 그리고 젊고 잘 생긴 대선 유력 정치인의 민망한 모습은 우리를 참으로 슬프게합니다. 


또 하나는, 나라 경제를 살려 달라고 뽑아 준 국가 수장이 국가와 국민을 대상으로 벌였던 그 끝없는 탐욕과 기만의 정치는 우리를 경악케 합니다. 죽어서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데, 이름을 남기기는 남기네요. 명성과 출세의 허상이 남긴 초라한 뒷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들과는 다른 차원의 삶에 대한 시 한 편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우리들의 정신과 마음의 정화를 위해. 이 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선종한 어느 삶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말하고 싶고 쓰고 싶은 욕망마저 참고 견디며 한 평생을 살다 간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삶이 아닐까 시인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름과 말과 글을 남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무엇을 남긴다는 것은 인간의 추한(?) 욕망 때문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후반부로 접어든 시인 김광규는 그의 삶과 시쓰기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 줍니다. 그는 시작메모에서 “자기가 살아 온 생애보다 앞으로 살아 갈 생애가 짧다는 것을 깨달을 때쯤 사람들은 철이 들기 시작한다. 지천명의 나이가 지나면 세상사에 대하여 대개 말수가 적어지고, 시인들은 젊었을 때처럼 긴 시를 쓰지 못한다. 삶과 글이 차츰 접근하다가 마침내 일치하는 시점에서 태어나는 것은 완벽한 시일까 아니면 절대 침묵일까.”하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너나없이 한마디씩은 떠들어대는 요즈음, ‘절대 침묵’은 인간 내면의 진실한 소리를, 나아가서는 자연과 우주의 심오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대각한 고승들은 열반에 들기 전에 대침묵으로 이승을 마감하는 것이 아닐까요? 


 시인들이여! 깨달았거든 쓰지도 남기지도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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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24
10963
2018-03-08
바지락 줍는 사람들 / 이가림

 
바지락 줍는 사람들 / 이가림

 

 

바르비죵 마을의 만종 같은
저녁 종소리가
천도 복숭아 빛갈로
포구를 물들일 때
하루 치의 이삭을 주신
모르는 분을 위해
무릎 꿇어 개펄에 입 맞추는
간절함이여

 

거룩하여라
호미든 아낙네들의 옆모습

 

 

 

 


                   

 

                   1943년 만주 출생, 본명 이계진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전 인하대 불문과 교수
                   시집 <순간의 거울> 등

 

 


 

 

 

기도 드리는 사람들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시를 다시한번 찬찬히 읽으며 마음의 화폭에 그림을 그려 보십시요. 어느 구절에 끌렸는지 찾아 보십시요.


 시인은 조개 잡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밀레의 명화, <만종>을 연상합니다. <만종>은 황혼의 들판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시에서는 황혼의 바닷가가 그 배경입니다. 그 황혼은 저녁 종소리가 들리는 천도복숭아 빛깔의 황혼입니다. 그것은 소리와 색깔을 배합해 빚은, 간결하고 선명한 언어로 그린 한 폭의 그림입니다.


 <만종>이 한 해의 추수를 끝내고 감사하는 기도의 모습을 그렸다면, <바지락 줍는 사람들>은 하루 치의 이삭(바지락)을 줍는 노동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노동의 모습은 곧 기도의 모습으로 인식 됩니다.


무릎을 꿇고 조개를 캐내는 아낙네들의 옆모습에서 시인은 추수, 즉 조개잡이를 가능케 해주신 모르는 분(절대자 / 하느님)을 위해 무릎 꿇어 경배 드리는 기도의 모습을 봅니다. ‘노동은 곧 기도이다’ 라는 서술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노동을 거룩한 기도의 차원으로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인 시인은 제 3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신이 감동받았던 어느 한 순간의 장면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그 감동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 감동은 모르는 분을 위해 무릎 꿇어 입맞추는 간절함입니다. 이는 서구적인 정서와 종교적인 발상에 그 사고가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섬세한 시어의 선택에서도 서구적인 뉴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르비죵’ 이라는 프랑스 마을의 지명뿐만 아니라, 바지락이라는 순수한 우리말과 ‘아낭네’로 발음되는 아낙네의 비음과 모음의 부드러운 부딪힘에서 프랑스어가 연상되는 것은 시인 이가림이 불문학자이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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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6
겨울노래-오세영

 

겨울노래    / 오 세 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 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196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무명연시> <사랑의 저쪽>
서울대 국문과 석좌교수 

 

 

 

 

 

 


 산이 산인들 어쩌겠느냐

 

 지금 평창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모인 올림피언들의 겨울 축제가 한창입니다. 하얗게 눈 덮인 산기슭을 미끄러져 내리고 활강하고 점프하는 스키어들의 모습이 활기차고 역동적입니다. 그 설산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옆의 시는 고요하고 정적입니다.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합니다. 설산에 포근히 안긴 산사의 모습은 평화롭습니다. 하얀 눈을 배경으로 산까치, 다람쥐 그리고 먹을 갈아 난을 치는 풍광은 흑과 백의 대비를 이루며 고요를 넘어 적막합니다. 거기에 빈 가지에 매달려 떨고 있는 빨간 홍시 하나가 적막을 깨고 생기를 불어 넣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듣습니다.


 한국현대시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이 시는 오세영 교수의 대표작이며 제 4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이기도합니다. 그의 언어는 얄미우리만치 맑고 영롱하고 투명합니다. 시적 언어와 산문적 언어의 경계마저 무너진 요즈음의 시 창작 경향에 비춰 보면 그의 시에서 만나게 되는 언어는 명경지수같이 맑고 투명합니다. 그리고 정제된 형식과 단아한 문체는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줍니다.


 또한 노자와 장자에 기초한 무공사상과 선불교를 통한 역설의 논리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의 시를 관통하는 기본적 철학입니다. 그의 시안은 현상 저 너머에 있는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실존적 사유가 그의 시세계의 내면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합니다.


 고승 성철 스님이 입적하기 전, 남기신 말,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가 한창 인구에 회자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고 달관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듯한 시적 변용을 보여 줍니다.


 오늘은 설날입니다. 설산 같은 하얀 마음으로 새해 아침을 열어 봅시다.

 

 

 

 새해 첫날 새벽
 창을 열고 밖을 보아라.

 

 눈에 덮여 하이얀 산과 들,
 그리고 물상들의 눈부신 


 고요는
 신의 비어 있는 화폭 같지 않은가

 

 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 

 

-    오세영의 <설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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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6
섬-안도현

 

- 안도현

 


섬, 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번 가봐라, 그 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 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 눈 밝혀야 하리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겨울 바다의 추억

 

시인의 어투를 빌어 말한다면, <섬>하면, 젊은 날 친구들과 어울려 여름 한철 낭만을 즐기던 곳으로, 그대와 호젓이 밀애를 속삭이던 곳으로, 혹은 그대 떠난 어느 날 앙상한 가지만 남겨 놓고 서있는 나무를 바라보다 문득 겨울바다가 보고 싶어 훌쩍 떠나, 파도 소리 들으며 홀로 해변가를 거닐던 곳으로,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 이 시에서 시인은 그런 감상적인 시선으로 섬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 안간 힘을 쓰는’ 처절한 우리들 삶의 현실을, 또한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이렇게 되뇌며 삶의 본질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세파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항상 세상을 파도에 비유합니다. 보편적인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이 시는 ‘세상과 파도’라는 진부할 수도 있는 비유를 사용하면서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과 싸워 이겼노라”하는 식의 단세포적인 인간승리(?)의 영웅담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지워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섬>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우리 인간들의 안쓰러운 삶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항해로 혹은 고해로 인생을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 둘은 다 바다가 배경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항해는 파도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파도에 지워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서있는 수동적이며 방어적인 애처로운 섬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망망 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섬>은 그래서 외로움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외로움은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은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임으로 사유적이고 명상적입니다.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 봐라,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 눈 밝히리’라고 시인은 우리를 섬(고독한 상태)으로 인도하여 “삶이란 게 뭔가”라는 본질적인 명제를 제기합니다. ‘너’ 스스로가 깨달아야 한다고 질타합니다. 여기서 ‘너’는 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우리 모두일 수도 있으며 특히 정치인일 수도 있습니다. 


 사족으로, 허위와 기만으로 스스로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정치인에게 “삶이란 게 뭔가”라는 명제는 사치스러운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마디!… “왜 그렇게 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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